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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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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도 전투는 255년 위나라와 촉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다. 촉나라 대장군 강유는 위나라의 섭정 사마사의 죽음을 틈타 북벌을 감행하여 적도현을 공격했으나, 위나라 정서장군 진태의 반격에 직면했다. 진태는 적도성을 포위한 강유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촉군은 퇴각했다. 이 전투는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으며, 위나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서부 지역 방어 체계를 지켜냈다. 이 전투의 결과로 강유는 대장군으로 승진했고, 등애는 안서장군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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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적도 전투
부분전강유의 북벌
시기기원후 255년 9월 ~ 11월 11일 (추정)
장소간쑤성, 중국
결과조위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위
교전국 2촉한
지휘관
조위 지휘관진태
등애
호분
촉한 지휘관강유
하후패
장익

2. 배경

253년 2월, 촉나라의 대장군 비의는 북벌에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위나라 항장 곽순에게 암살당했다.[2] 이 사건으로 북벌 추진파였던 위장군 강유가 대군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오나라의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공격할 때 강유에게도 출병을 요청했고,[2] 강유는 무도에서 출격하여 남안을 포위했지만, 진태 등이 구원군으로 오면서 군량이 부족해져 퇴각했다.

254년, 위나라 적도현의 이간이 비밀리에 항복을 요청해 왔다. 촉나라 사람들은 의심했지만, 장억은 이간의 항복이 진심이라고 판단했다. 강유는 장억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해 여름 6월, 장억 등을 이끌고 다시 북벌을 시작했다.

3. 전투 과정

253년 2월, 촉나라의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 항장 곽순에게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북벌 추진파였던 위장군 강유가 대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같은 해, 오나라의 제갈각이 합비신성을 공격할 때 강유에게도 출격을 권유하여[2], 강유는 무도에서 출격하여 남안을 포위했지만, 진태 등이 구원 오고 군량이 떨어져 철수했다.

254년, 위나라 적도현의 이간이 몰래 항복을 청했다. 촉나라 사람들은 의심했지만, 장억은 진심이라고 간파했고, 이에 동의한 강유는 여름 6월, 장억 등을 이끌고 다시 북벌을 감행했다. 강유가 적도현에 도착하자 이간은 성문을 열고 관민과 함께 맞이하며 군자금을 제공했다.

255년 여름, 강유는 차기장군 하후패와 진남대장군 장익을 이끌고 다시 북벌을 감행했다.[6] 이 때, 국가의 약소함과 민중의 고통을 이유로 장익이 반대했지만 강유는 이를 듣지 않았다.[8] 위에서는 곽회가 사망하고, 진태가 정서장군, 가절, 도독옹량제군사로 승진하여 농서 수비를 맡았다.[9]

3. 1. 초기 촉의 승리 (254년)

이간은 성문을 열고 관민과 함께 강유를 맞이하며 군자금을 제공했고, 강유는 이 군자금을 의지했다.[3]

위나라에서는 허창에 주둔하고 있던 사마소를 정서장군에 임명하여 장안으로 향하게 하는 동시에[4], 토촉호군 서질에게 강유를 요격하게 했다.

서질은 장익의 군과 교전하여 승리하고 장익을 죽였다. 이때 장익은 마비 증세로 병들어 지팡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였지만, 용감하게 싸워 서질에게 아군(자군)의 두 배에 달하는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5] 장익과의 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서질은 양무에서 강유의 포위를 받고 패배하여 전사했다.[6]

강유는 승세를 타고 다수의 적병을 항복시키고, 적도에 군을 돌려 공격할 것을 선전했다. 겨울이 되자 강유는 함락시킨 하관, 적도, 임조의 세 현의 주민들을 촉나라로 끌고 돌아갔다.[7]

3. 2. 도서 전투 (255년)

255년, 촉나라 장군 강유는 위나라 섭정 사마사가 죽은 틈을 타 하후패, 장익 등과 함께 북벌을 감행했다.[6] 이때, 장익은 국력이 약하고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강유는 듣지 않았다.[8]

위나라 옹주자사 왕경은 진태의 지시를 어기고 고관에서 강유와 교전했다. 고관은 현재 간쑤성 린타오현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도하 서쪽에 있었다. 양군은 도하 서안에서 격돌했고, 위나라는 참패했다. 도하에서 탈출하려다 익사한 병사만 1만 명이 넘었고, 왕경의 병력 대부분이 손실되었다. 이 전투는 강유가 북벌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6]

왕경은 1만여 명의 잔병을 이끌고 적도성으로 후퇴했고, 강유는 적도성을 포위했다.

3. 3. 위나라의 반격

陳泰|진태중국어는 증원군을 이끌고 적도성으로 향했다. 등애는 적도성을 포기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진태는 이를 반대하고 강유의 보급 문제를 지적하며 즉각적인 구원을 주장했다.[9] 그는 은밀하게 진군하여 적도성 동남쪽 산에 도착했고, 봉화와 북소리로 성 안의 수비군과 연락하여 사기를 높였다.

3. 4. 촉군의 퇴각

강유는 위나라 증원군이 빠르게 도착하고 보급 문제가 발생하자 포위를 풀고 퇴각해야 했다. 왕경은 진태에게 식량이 열흘 치밖에 남지 않았었다고 밝히며, 증원군이 제때 도착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3]

4. 결과 및 영향

위나라가 촉군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피해는 막심했다. 위나라 황제 조모(曹髦)는 칙령을 내려 구호 활동에 전념하고, 군 징집과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했다. 또한 촉나라로 투항한 사람들의 남겨진 가족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11] 조모는 진태등애에게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도록 명했는데, 전투가 끝난 지 백여 일이 지나도록 많은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11]

등애는 "도서(洮西)에서의 패배는 작은 실패가 아니다. 군이 깨지고 장수가 죽었으며, 미창(米倉)이 비어 주민들이 흩어져 유랑하고, 롱서(隴西)는 거의 멸망의 위기에 있다."라며 피해의 심각성을 강조했다.[12] 왕기(王基)는 사마소와 이야기할 때, 도서의 싸움을 동흥 전투와 비견될 정도의 큰 패배로 언급했다.[13]

진태는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낙양으로 소환되어 비서감으로 승진했고, 정서장군 지위는 사마망(司馬望)에게 넘어갔다. 등애는 정식으로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되어 옹주와 양주를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초기 패배의 원인이었던 왕경은 수도의 다른 직책으로 전보되었고, 옹주 자사 자리는 등애의 부하 제갈서가 맡았다.

한편, 촉나라에서는 이 전투의 공으로 강유대장군으로 승진했다.[6] 그러나 강유의 북벌에 반대했던 장익과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지만, 강유는 출격 때마다 장익을 데리고 나갔고, 장익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8]

등애는 강유가 다시 침공할 것을 예상하고 방비를 강화했다. 그 결과, 다음 해의 단곡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사마망(司馬望)은 진태의 뒤를 이어 정서장군(征西將軍)·지절(持節)·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로 부임하여 방위 체제를 재검토하고, 강유가 침입할 틈을 없앴다고 한다.[14]

5. 평가

적도 전투는 초반 촉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의 전략적 대응과 보급 문제로 인해 강유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전투로 평가된다. 진태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신속한 결단력으로 위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등애는 전략적 안목을 제시했지만, 당시에는 진태의 판단에 가려졌다.

위나라는 이 전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등애는 도서에서의 패배가 작은 실패가 아니며, 롱서 지역이 거의 멸망의 위기에 있다고 평가했다. 위 황제 조모는 도서의 패전을 자신의 부덕에 있다고 사과하고, 사망하거나 포로가 된 장병의 가족을 위문하고 부역을 1년 면제했다.

촉나라에서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강유가 대장군으로 승격되었다.

5. 1. 군사적 평가

강유는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보급 문제와 위나라의 전략적인 대응으로 인해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9] 진태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신속한 결단력으로 위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마소는 순의에게 陳泰|진태중국어는 침착하고 용감하며 결단력이 있다는 평가를 했다.[9] 반면, 등애는 전략적 안목을 제시했지만, 당시에는 진태의 판단에 가려졌다.[12]

위나라의 피해는 매우 컸다. 등애는 도서에서의 패배가 작은 실패가 아니며, 군이 깨지고 장수가 죽었으며, 미창(米倉)이 비어 주민들이 흩어져 유랑하고, 롱서(隴西)는 거의 멸망의 위기에 있다고 평가했다.[12] 위 황제 조모는 도서의 패전을 자신의 부덕에 있다고 사과하고, 방치된 채로 있던 유골을 수습하도록 명했으며, 사망하거나 포로가 된 장병의 가족을 위문하고, 부역을 1년 면제했다.[11]

촉나라에서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강유가 대장군으로 승격되었다.[6]

6. 주요 인물

255년 촉나라 장군 강유사마사의 죽음을 틈타 위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하후패와 장익이 참전했는데, 하후패는 촉나라 황실의 친척이었고 장익은 유비를 섬겼던 인물이라 강유보다 선배로 여겨졌다. 이들은 행정 업무에서는 강유보다 높은 직책이었지만, 군사 작전이었기 때문에 강유가 지휘를 맡았다.[1]

6. 1. 위

위나라 군촉나라 군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呉志 諸葛恪伝・注『漢晋春秋』
[3] 서적 魏志 斉王紀・注『魏氏春秋』及び『世語』
[4] 서적 晋書』文帝紀
[5] 서적 蜀志 張嶷伝
[6] 서적 蜀志 姜維伝
[7] 서적 蜀志 後主伝
[8] 서적 蜀志 張翼伝
[9] 서적 魏志 陳羣伝・付陳泰伝
[10] 문서 曹髦の詔勅の中で「戦場で戦死した者・洮水で溺死した者達の屍がそのままになっている」とある。
[11] 서적 魏志 高貴郷公紀
[12] 서적 魏志 鄧艾伝
[13] 서적 魏志 王基伝
[14] 서적 晋書 義陽成王望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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